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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엔 끝이 없어

집에서 저녁 먹고 작업실로 오려는데, 퇴근한 언니가 내 가방 속의 플라스틱 백을 보고 말한다. 
"너, 아직도 ㅈㄴ 서점에서 책을 사니?" 

작은 서점의 수난시대라지만 작업실이 있는 건물 로터리에는 내가 초등/국민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있는 동네 서점이 아직도 있다.이전부터 운영하시던 아저씨는 할아버지가 되었고 그 아들로 보이는 젊은 주인이 저녁 때는 일한다. 주변에 아직 초등, 중학교가 몇 군데 있는 만큼 그 학생들이 주된 고객인 모양으로 참고서가 서가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가끔 가보면 문학이나 인문 신간도 꽤 많이 들어와 있다. 어렸을 때만해도 여기서 일신 추리 문고나 범우사 문고 등을 사서 읽었는데, 지금은 내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책을 살까 꽤 궁금하다. 하지만 동네 서점이 없어지는 것은 원치 않으므로 가격은 온라인에서 주문하는 것보다 비싸고 원하는 책이 없을 때도 많지만 종종 들러서 구입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 동네 서점이 아니다. 플라스틱 백 속에 들어있던 책들이지.  

저녁 먹으러 집에 들르기 전, 서점에 들렀었다. 가끔 사려고 생각지 않았지만 의외로 눈에 띄는 책을 사기도 하고, <3월의 라이온>이 시리즈로 있다면 구입할까 생각도 있었다. 또, 셰리 터클의 <외로워지는 사람들>도 살까 생각하기도 했고. 물론 이 책들이 있을 거라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고른 것은 이제 같은 내용을 은근히 반복하는 <심야식당 10>과 움베르트 에코의 신작 <프라하의 묘지 1>이었다.  

<프라하의 묘지>는 총 두 권짜리 책인데, 망설이다가 한 권만 샀다. 일단 지금 책을 쟁여 놓은 상태에서는 언제 다 읽게 될지 모르는데 두 권이나 눈 앞에 놔두고 있다는 것은 너무 큰 부담. 한편으로는 1권만 읽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2권을 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실로 많은 이들이 두 번째 이유로서 1권만 구입하는 듯하다. 인터넷 서점만 보아도 1권의 판매지수가 2권보다 훨씬 높다는 건 그런 의미일 터이다. 호기심이나 우연한 이유로 1권을 사지만, 2권까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만해도 1권만 읽은 책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령 기억나는 것은 <책도둑>. 도서관에서 빌렸지만 2권이 언제까지나 들어오지 않아서 읽지 않았고, 딱히 챙겨 읽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살 때는 그렇게 산 적이 없다. 두 권짜리 책을 첫 권만 사다니. 물론 <11/22/63>이 두 권짜리임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한 권씩 시기를 달리해서 냈다는 걸 모르고 산 적은 있지만 결국 두 권을 다 구입했다. 빌려 읽는 것과는 다르게, 산다는 건 투자 비용이 있는 만큼 읽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뜻.  1권만 읽는다는 건 찜찜하잖은가. 머리를 감다가 미처 다 헹구지 못한 듯한 찜찜함? 하다만 말이 허공에 걸린 듯한 찜찜함?! 하다 못해 어디 가서 그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도 없잖나. 하지만 2권을 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1권을 사는 것은 마치 결혼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제껏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서서히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더니 최근에는 좀 달라졌다. 이제는 동시에 읽는 책도 너무 많고 끝을 보지 않는 책들도 많아졌다. 집에 와서 <심야식당 10>을 읽었는데, 이전에 읽은 것이었다! 하지만 9권의 이야기가 나와도 읽었는지 아닌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침엔 마크 해던의 <한밤중에게 개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글을 쓰는데, 결말이 어떤 방향이었는지 알 듯 말 듯했다. 나는 이제 기억의 정오를 넘어서 석양으로 가고 있고 이런 일은 더 잦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반이나 투자했는데 영광의 결말이 기대되지 않는다면 접는 게 나의 남은 시간을 더 현명하게 쓰는 방법이 아닐까? 

시간과 비용 효율의 문제를 접어두더라도 "안다"라든가 "읽었다"는 경험에 대해서 재고해볼 필요도 있다. 나는 어차피 읽은 책들을 다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책의 모든 부분이 다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떤 책들은 끝까지 읽어도 계속 동어반복적 이야기만 하고 있고 영감이나 계몽의 경험만 얻는다면 결말을 알아야 하지도 않을 것이다. 책들의 정보나 이야기는 일련번호가 붙어 도서관의 서가처럼 정리되어 있지 않고 더 넓은 들판에 흩어진 양떼같기도 하고 느슨하게 연결된 거미줄 같기도 하다. 이제도 아직 선형적 읽기를 고집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피에르 바야르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용할 만큼 구체적으로 기억도 나지 않는다. 고심해서 찾아보기 전까지는.), 텍스트는 선형적으로 나열되지 않고 안과 밖이 명확하게 존재하지도 않는다. 내가 어떤 책의 줄거리를 말한다면 그 순서는 정확할까? 본디의 내용과 같을까? 또, 중간만 읽거나 군데군데 발췌해서 읽은 책은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일까? 끝까지 읽은 사람과 독서의 경험이 다를 순 있겠지. 하지만 다 읽었을 경우에도 경험은 다를 수 있다. 혹은 부분만 읽었어도 전체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 뭐든 끝을 볼 필요는 없어. 중간에 그만둘 수도 있는 거다. 반드시 결혼에 이르는 연애를 해야 하는 게 아니듯이 결론에 이르는 독서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연애관과 독서관이 같이 가다니, 이 얼마나 일관성 있는 애서가의 삶인가!) 뭐든 끝까지 읽겠다는 강박을 버려야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뒤를 먼저 읽고 앞을 읽는다고 해도 내 안에선 같거나 다른 효과를 가질 수 있다. 좀 더 다채롭고 자유로운 감상. 능동적 독서가로서의 새로운 탄생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제 게을러진 건망증 독서가의 자기 적응을 변호하기 위한 정당화일 수도 있고. 

이 이야기의 결론이 그래서 뭐냐고? 맨 처음에 말했지 않나. 뭐든 결론을 볼 필요는 없다. 


by 연연 | 2013/02/04 22:47 | 쓴 글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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